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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시선] 디아스포라의 묘

개인적으로 연이 없는 이들의 타계 소식이 마음을 휘젓고 지나갈 때가 있다. 유명 연예인이나 정치인의 죽음이 그런 슬픔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우리의 감성과 지성을 살찌운 책의 저자나 마음속으로 흠모하던 정신적 스승의 죽음은 생각보다 큰 상실감을 수반한다.   필자는 ‘디아스포라 지식인’으로 불린 재일조선인 2세 서경식 교수의 타계 소식을 들었을 때 그랬다. 두 달 전인 12월 18일, 자택에서 향년 72세로 타계한 그는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역사의 증인 재일 조선인’ 등 여러 권의 저서를 통해 자신과 재일조선인, 더 나아가 소외된 이들의 존재에 관해 물었다.     서 교수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왜 그가 생전 그런 고민을 했는지 조금은 가늠할 수 있다. 1951년 피비린내 나는 6·25 한국전쟁 중 교토에서 태어난 그의 삶은 일본 내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의 서사로 점철된 것과 동시에 모국의 분단 이데올로기 희생양이기도 했다.   그의 청년 시절, 서울대에서 공부하던 친형 둘이 이른바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휘말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 일이 있었다. 대한민국 여권을 소지한 일본 거주 재일조선인에게 분단된 한반도는 상냥하지 않았다. 그는 20년의 세월 동안 형들을 위한 구명 활동과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장례를 치러야 하는 비애를 겪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유독 ‘죽음’에 집착한다.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 언제나 그게 마음에 걸린다” 라는 ‘디아스포라 기행’의 한 문구가 그런 심리를 대변한다. 그는 생전 여행하는 나라의 예술가와 철학자들이 묻힌 묘지를 방문하곤 했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하나하나의 묘가 그에게는 다 같지 않았다. 대부분의 묘는 전통적 양식, 종교적 예식, 문화적 유산, 가문의 역사를 반영한다. 하지만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묘, 묘비가 쓰여 있지 않은 묘를 그는 ‘디아스포라의 묘’라고 명명했다. 그렇기에 그가 평소 자신과 같은 디아스포라적 배경을 가진 지식인들에 끌린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는 프리모 레비와 에드워드 사이드를 자주 인용했다. 레비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유대계 이탈리아인 작가이고, 에드워드 사이드는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주장하던 팔레스타인계 미국 석학이다. 레비와 사이드는 각각 유대인, 팔레스타인으로서 자신들이 겪은 디아스포라적 경험을 자기연민의 도구나 타자에 대한 무기로 이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은 이산의 경험과 약자의 서러움을 공유하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두 집단이 서로 대치할 수 밖에 없는 모순적 현실에 신음했다.     현재 진행되는 또 다른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역사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위치는 항상 뒤바뀔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늘 긴장을 놓을 수 없다. 내가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아니 내가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서 교수는 식민주의적, 국가주의적 폭력을 끊을 수 있는 힘이 디아스포라적 삶을 통해 가능하길 염원했다. ‘의식적으로 피차별자의 위치에 서는 것’이 그것이다. 그는 실제 피차별자로 살았지만 의식적으로 한 번 더 그렇게 살아가려고 했다. 자신이 경험한 차별과 배척의 기억을 다른 소수자, 약자, 디아스포라들을 인식할 수 있는 보편적 시선으로, 심오한 질문으로 승화시켰다. 나는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인가. 우리는 왜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 가져야 하는가. 왜 세상을 바꾸어야 하는가.   그는 생전 마지막 강연에서 자신의 정신적 스승, 레비가 인간해방의 보편적 가치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수용소에서 ‘값비싼 대가를 치렀던’ 인간이었음을 대중에게 상기시킨다. 서 교수 역시 그랬다. 그는 한반도 근대사의 풍파를 정면으로 맞으며 ‘값비싼 대가’를 치른, 그래서 우리에게 ‘디아스포라적 삶’이라는 유산을 남긴 사람이다. 죽음에 가까워진 이들이 외쳤던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희망에 대한 담론은 그래서 무게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필자는 생전에 꼭 뵙고 싶었던 서 교수의 묘, ‘디아스포라 묘’를 꼭 찾아볼 것이다.  전후석 / 다큐멘터리 감독디아스포라 시선 거주 재일조선인 유대인 팔레스타인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2024-02-12

[디아스포라 시선] 미주 한인의 ‘이중성’ 존중 받으려면

올해 재외동포청이 출범하면서 재외동포들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이해와 담론의 중요성이 대두하고 있다. 필자도 최근 재외동포 관련 학술대회에 참석해 미국에서 살아가는 재미 한인 창작자로서 한국과 어떤 관계를 갖고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과 소감을 나눴다. 그러나 행사가 종료된 후 모든 참석자가 유창한 한국어로 토론했던 사실을 상기하는 것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국의 내 또래 한인들도 과연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할까?’   답을 찾기에 앞서 우선 필자와 비슷한 연령대의 재미 한인에 대한 일반적 정의가 필요할 것 같다. 이들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한국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고 미국에 유학이나 이민을 와 정착한 이들이다. 또 한 그룹은 미국에서 태어난 2세, 3세 친구들이다. 편의상 전자를 ‘A그룹’, 후자를 ‘B그룹’이라고 하자.     두 그룹 모두 재외동포에 속하지만 사유 방식엔 다소 차이가 있다. ‘A그룹’ 친구들은 모국과의 관계성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한국은 너무 익숙한 곳이다. 한국어가 가능하고 한국적 문화와 사고에도 익숙하다. 이들 중 일부는 본인을 재미 한인이 아닌 한국인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그들은 한국에 가더라도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사회의 일원으로 적응하여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한국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갖고 있다.   반면, ‘B그룹’은 조금 다르다. 이들에게 한국 혹은 한반도란 부모 혹은 조부모가 떠나온 친근하면서도 낯선 곳이다. 모국은 본인 정체성의 뿌리지만 자신이 온전히 속하기는 힘든 곳이다. 특별한 정서적 연결점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감도 존재하는 곳이다.     그들에게 한국과의 관계는 복합적이다. 그들은 불명확한 모국과의 관계에 집중하기보다는 본인이 거주하는 미국에서 미국인으로서 기능한다. 물론, ‘코리안 아메리칸’, ‘아시안 아메리칸’, 혹은 ‘소수계’나 ‘주류 미국인’ 등 각자 본인을 인식하는 방법은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역사적으로 A그룹에 속한 재미 한인이 많았다면 앞으로는 B그룹의 재미 한인이 대다수가 될 것이다. 이는 한국의 출산율 하락과 미국으로의 이민 감소에 따른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최근 한국의 발전과 한류의 세계화로 젊은 한인들도 한국에 대한 관심이 과거에 비해 크게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디아스포라의 ‘현지화’는 불가피할 것이다. 120년 전 하와이로 이주해온 한인들의 후손이 그랬고, 쿠바에 있는 한인들, 멀리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과 조선족, 재일교포들이 현지화의 과정을 겪었다.     그렇기에 재외동포청의 동포 관련 정책 방향은  A그룹 보다는 B그룹에 속한 이들과의 상호보완적 관계 설정에 주목하는 것이 더 미래지향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이미 현지화된  그들을 과도하게 ‘한국화’하려는 시도 보다는 그들의 특수한 이중적 혹은 중층적 정체성에 대한 인정과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B그룹의 한인들에게도 과제가 있다. 이들은 모국과의 관계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갖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다. 부모인 이민 1세들은 생존 문제에 매달리느라 이들에게 모국이라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전쟁이 발발하면서 젊은 유대계 미국인들과 아랍계 미국인들 사이의 갈등 양상도 벌어지고 있다. 이처럼 디아스포라는 아무리 현지화가 되더라도 자신의 선조가 떠나온 곳과의 심리적 관계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이 때로는 자신을 괴롭힐 수도 있지만, 그 양가성과 이중성은 자신의 실존적, 지적, 문화적 세계관을 더욱 살찌우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재미 한인들이 모국과의 관계성에 대해 진지한 사유를 할 수 있을 때, 그들의 디아스포라 적 정체성, 온전한 이중성은 더 존중받을 것이다. 전후석 / 다큐멘터리 감독디아스포라 시선 이중성 미주 재미 한인 또래 한인들 양가성과 이중성

2023-12-27

[디아스포라 시선] 한인들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갈라 시즌이다. 필자가 거주하는 뉴욕도 매주 여러 한인 비영리 단체들의 연말 갈라 행사로 분주하다. 이들 단체는 갈라에서 모인 후원금으로 각자 목표하는 사회적 대의 실천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한다. 종류는 다양하지만 대부분 아시아계 미국인의 권익 향상, 한인 청소년 장학금 마련, 저소득층 가정 지원, 서류 미비 청년 추방유예 운동 등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대부분의 갈라에서는 오랜 기간 한인 사회와 지역 공동체를 봉사와 헌신으로 섬긴 이들에게 공로상을 수여한다. 또 한인 정치인부터, TV나 영화에서 보던 한인 배우, 혹은 대기업 임원으로 성공한 한인 등 유명 인사를 초청해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그들은 주류사회에서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활동하며 리더로서의 모습을 보이지만 갈라에서는 지극히 평범하고 어쩌면 초라하기까지 했던 이민자 혹은 이민자 자녀로서의 추억들을 회고한다. 한인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에피소드들이다.     필자는 4년 전 한 행사에 참석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2019년 10월 애틀랜타에서 열렸던 KAC (Korean American Coalition) 전국대회다. KAC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한인 풀뿌리 단체 중 하나다. 당시 주최 측의 초대로 한국에서 온 분이 사흘 동안 대회를 참관했다. 그는 마지막 날 갈라가 진행되던 중 옆에 앉았던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재미 한인들은 왜 그렇게 서로를 도와주려 하고 공동체를 위해 합심하는 모습을 보이지요? 참 신기하네요.”   그의 말에는 당혹감과 함께 경외로움이 묻어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은 평소 자신이 아닌 타인, 더 나아가 공동체의 발전과 역량 강화라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던 필자에 대한 책망같이 들리기도 했다. 어쩌면 그가 한국에서 소속감을 느꼈던 범주는 학연, 지연, 혹은 경제적 이해관계나 정치적 이념 등에 한정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이런 범주를 벗어나 자발적으로 타인과 긍정적 상생 관계를 모색하는 한인들의 모습이 그에게는 특별하게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한인 사회와 한인 비영리 단체들이 모두 이상적이거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한인 교회에서 벌어지는 갈등, 한인회장 등 단체장 선거 때 등장하는 각종 비방, 1세와 2세 간의 소통 단절, 정치적 이념 차이로 인한 논란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은 기본적으로 이민자로, 이민자의 자녀로, 그리고 소수계로서 공유하는 기억들이 있다. 그것은 경제적 어려움일 수도, 유색 인종으로 겪은 차별일 수도, 이민자로서의 서러움일 수도 있다.     이런 기억의 공유가 과거에 기반을 둔 유대감이라면,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운명의 배를 함께 타고 있다는 자각과 연대 의식은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다.     함께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의 희망을 공유하는 공동체로서 더욱 주목할 점은 젊은 한인 2세, 3세들이 생각하는 한인이라는 범주의 확장성이다. 그들이 주축이 된 갈라에서는 한인 입양인, 혼혈인, 성 소수자는 물론 타 아시아계와 소수민족들도 함께 어울리는 광경이 연출된다.     어쩌면 한국에서 온 참관자가 놀랐던 이유는 그것이었을 수 있다. 단순히 ‘코리안’이라는 민족적 한계를 넘어 다른 사람도 인지할 수 있는 시선, 그 공동체성의 본질 말이다. 이런 한인 사회의 특별함이 더욱 확장되고 오랫동안 지속하기를 간절히 염원해 본다.  전후석 / 다큐멘터리 감독디아스포라 시선 한인 한인 정치인 한인 비영리 한인 풀뿌리

2023-11-28

[디아스포라 시선] 홍범도와 헤로니모

독립운동가인 홍범도 장군의 과거 공산당 입당 경력과 이로 인한 흉상 이전 문제로 나라가 떠들썩하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논란 가운데 재외동포 역사의 특수성에 대한 담론은 없다는 사실이다.       작년 12월, 필자는 젊은 고려인들 행사에 초청을 받아 카자흐스탄을 방문했었다. 카자흐스탄을 비롯해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에서 모인 수십명의 한인들은 각자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했던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고려인들의 특수한 서사와 역사가 어떻게 창조적으로 표현될 수 있을지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했다.   참석자들은 러시아의 전설적 가수인 빅토르 최와 몇 년 전 안타깝게 피살된 카자흐스탄 스케이트 영웅이자 독립운동가 후손인 데니스 텐의 동상을 찾았다. 이어 방문한 고려극장의 전시실에 들어서자 홍범도 장군의 초상화가 우리를 맞았다. 홍 장군이 수위장으로 말년을 보낸 역사적 공간이다. 고려극장은 몇 년 전부터 카자흐스탄 국립극장으로 지정되어 국가 보조를 받기 시작했지만 오직 고려인들의 노력으로 90년간 그 명맥을 유지했다.       홍범도 장군은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분적 억압과 착취를 경험했다. 홍범도 연구 권위자인 반병률 교수는 이런 배경이 그의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이 그에게는 다분히 이상적 대안으로 보일 수 있지 않았을까. 비록 지금은 그것이 실패한 사회적 실험으로 밝혀졌지만….   만약 공산당 가입 사실로 인해 홍범도 장군의 삶과 업적이 부정되어야 한다면 과거 소련에 살았던 수많은 고려인과 그들의 후손,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 그리고 쿠바 한인들의 복잡한 이주사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그들도 ‘공산주의자’ 혹은 ‘공산주의 동조자’ 로 분류되어야 할까.   지난 2015년 12월 쿠바를 여행했던 필자는 우연히 한인 3세 택시 기사인 패트리샤를 만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쿠바 혁명에 참가했으며 나중에 차관보까지 지낸 임은조(헤로니모 임) 선생이었고, 할아버지는 쿠바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던 독립운동가 임천택 선생이다. 임천택 선생은 3살 때인 1905년 제물포에서 홀어머니의 손을 잡고 멕시코행 선박에 올랐다. 하지만 1000여명의 조선인이 도착한 멕시코는 지상낙원이 아니었다. 그중 일부가 더 나은 삶을 위해 쿠바로 이주했다.   쿠바의 한인들은 1959년 쿠바 혁명 전까지 온갖 차별을 받는 3등 시민이었다. 나라를 잃은 무국적자 신분으로 대부분 가난했다. 하지만 혁명 이후 한인들도 동등한 시민으로 대접받았고 실제 삶의 질도 나아졌다. 적어도 카스트로의 독재와 소련의 붕괴로 인해 큰 시련을 맞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헤로니모 선생은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정부 초청으로 조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부친이 일생 간절히 염원했던 쿠바 한인 공동체 복원이라는 사명감을 갖게 됐다. 이후 헤로니모 선생은 10여년 간 쿠바 전역에 흩어졌던 한인들을 찾아 한인회 설립을 추진하고 선조들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는 등 한인 정체성 부활에 힘쓴다.   홍범도 장군과 헤로니모 선생의 삶은 격동의 한반도 근대사는 물론 자신이 뿌리를 내렸던 국가의 정치적 운명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자신을 보호해 줄 조국이 없는 상황에서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소련과 쿠바의 소수민족으로, 한인 사회의 리더로, 디아스포라의 여러 정체성 사이에서 자신의 역할과 조국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들이 선택한 삶의 방향은 한두 개의 수식어로 평가할 수 없는 깊고 복잡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다.   재외동포들의 다양한 서사는 분단 이념을 초월하는 한반도사의 풍부한 자산이 될 수 있다. 그들을 공산주의자와 자유민주주의자로 나누려는 퇴행적 발상을 지적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플 뿐이다. 카자흐스탄에 모였던 젊은 고려인들은 전쟁으로 인해 출신국의 편이 갈릴 수 있는 민감한 시기에도 불구하고 선조들의 역사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공유하며 화합과 연대를 선택했다. 디아스포라적 사유를 실천하는 그들의 존재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전후석 / 다큐멘터리 감독디아스포라 시선 홍범도 독립운동가인 홍범 쿠바 한인들 독립운동가 임천택

2023-09-18

[디아스포라 시선] 한미동맹 70주년 (2)-재외동포의 서사 '미군 신부'들

지난 7월 27일, 워싱턴DC에서는 여러 행사가 열렸다. 한쪽에서는 정전협정 체결 및 한미동맹 70주년 기념행사가, 다른 쪽에서는 종전과 평화를 염원하는 운동가. 시민들의 행진이 있었다. 전자는 한미동맹의 근간이 되는 자유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되새기며 계속되는 북한의 도발에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고, 후자는 70년 간의 대북정책을 반추하고 무력이 아닌 대화와 타협을 통한 평화를 강조하며 미 의회에 발의된 한반도 평화법안의 통과를 촉구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브룩스에 의하면, 우리는 자신이 자라온 사회적 환경과 유전적 성향, 문화, 종교 등을 기반으로 형성된 대서사(master narrative)를 통해 자신과 세계를 해석한다. 이 서사는 어떤 면에서는 세상의 원리와 현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동시에 자신의 욕망과 시선을 하나의 프레임에 가두기도 한다. 역사와 국제관계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요소들을 하나의 대서사만을 통해 지나치게 단순화할 경우 우리는 절대 선과 절대 악이라는 흑백론적 프레임에 갇히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필자는 지난 번 칼럼에서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을 통한 창조적 서사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한미동맹 70주년 행사들을 지배하는 대서사(대한민국 초대 대통령과 미국의 역할에 대한 무비판적 미화와 반공주의적 메세지)의 도덕적, 논리적 빈약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전쟁과 냉전시대를 겪은 세대의 숭고한 희생과 노고를 기리고 기억하는 행위는 중요하다. 하지만 미주 한인들은 국가적, 이념적 서사로 점철된 진영론에 동조하기 보다는 스스로의 보편적 서사를 통해 한미관계를 생각해봐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필자가 제작한 ‘초선’이라는 다큐멘터리에도 등장하는 메릴린 스트릭랜드 연방하원의원의 가족사는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리는 또 하나의 대안적 서사가 될 수 있다. 스트릭랜드 의원은 한국전쟁 후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출생한 1962년 당시 미국에서는 흑인들이 제도적 차별을 당했고, 타인종간 결혼은 불법이었다. 또 미국을 백인국가로 유지하려는 인종주의적 이민정책이 시행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은 1965년 이민법 제정 전까지는 미국으로의 공식 이민이 불가능했다.   반면 한국에서는 미군과 결혼한 여성에 대한 편견, 사회적 낙인찍기가 심했다. 흔히 ‘전쟁 신부’ 혹은 ‘미군 신부’라고 불리던 한국 여성 모두가 기지촌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설령 ‘기지촌 여성’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한·미 양국의 공조에 의한 제도적 피해자로 볼 수 있다. 지난 2022년 9월 대한민국 대법원은 한국 정부가 군사동맹, 외화벌이를 위해 수 십년 동안 미군 주둔지 인근에 기지촌을 직접 설치·운영한 점을 공식 인정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을 판결했다. 이 여성들은 미군 ‘위안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전쟁 후 한미동맹이라는 명분아래 자행된 비인간적, 비민주적 행위를 가감없이 직면해야 할 책임은 우리의 몫이다.   스트릭랜드 의원이 두 살 되던 해 미국으로 건너온 가족은 첫 날부터 흑인-한인 커플과 갓난아기를 받아줄 숙소를 찾는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세계한민족문화대전에 따르면 한국전쟁  이후 최소 10만 명 가량의 미군 신부들이 미국으로 왔고, 이들은 한국의 가족들에게 경제적 지원은 물론 추후 가족 초청 등을 통해 미국 내 한인 사회 형성의 토대를 닦았다. 미군 신부야말로 한국과 미국을 잇는 문화, 사회, 경제적 접점의 선두에 있었다. 그런데 한미동맹 70주년의 대서사에서 그들의 서사는 어디에 있는가?   스트릭랜드 의원은 인종차별과 한국전쟁이라는 양국의 비극 사이에서 잉태된 자신의 존재를 수용할 수 있었던 이유를 어머니의 사랑과 가르침에서 찾는다. 용산 미군부대에서 태어난 그녀가 연방하원의원이 된 서사는 그 어떤 국가주의적 수사법도 흉내낼 수 없는 감동과 무게감을 지녔다.     사실 대부분의 미주 한인들은 한미양국 관계에서 중간자적 위치에 있다. 한인들은 양국 사이에서 다중적, 포괄적, 초월적 사유를 할 수 있는 역량도 갖췄다. 물론, 강남순 교수가 지적했듯 단순히 지리적으로 외국에 거주한다고 재외동포적(디아스포라적)사유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부여된 자신의 주변성 (marginality by imposition)을 비판적 주변성(critical marginality)으로 전환시키고 정체된 이념적, 국가중심적 사유 방식을 인류보편적, 혁신적 사유로 탈바꿈할 수 있어야 한다.   미주 한인들이 국가적 서사에 동조되는 수동적 객체가 아닌 적극적 주체가 될 때, 한미동맹 70주년의 의미는 더욱 빛날 것이다. 전후석 / 다큐멘터리 감독디아스포라 시선 한미동맹 재외동포 미군 신부 한미동맹 70주년 창조적 서사

2023-08-14

[디아스포라 시선] 한미동맹 70주년 (1)-이념 초월한 서사

올해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관련 행사가 대한민국 정부 주도로 미국 전역에서 열리고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군사와 안보 중심으로 시작된 양국의 관계는 이제 경제, 과학, 문화, 공공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그 흔적이 드러난다.   ‘헤로니모’, ‘초선’ 등 다큐멘터리를 통해 해외 한인의 존재와 그들의 이야기에 천착해온 필자는 여러 관련 행사에 때로는 청중으로, 때로는 발표자로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필자는 기념일과 관련해 어떤 ‘서사’를 통해 그 날을 기억하는지 묻는 행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 무엇이 그 기념일을 의미 있게 하는가?     필자는 미국에서 태어나 살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고 지금도 대한민국에는 부모님과 많은 친구가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과 미국의 관계가 공고해지는 것을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한미동맹 70주년’ 행사들에 등장하는 지배적인 서사에 주목해 본다. 그 서사는 6·25 한국전쟁 때 대한민국을 위해 참전한 미국의 희생적 공로와 공산주의에 대항해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초대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고, 미국의 경제·안보적 지원에 힘입어 급속한 발전을 통해 선진국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의 세계적 지위에 초점을 둔다.     분명 우리가 자랑스러워 할 만한 서사다. 이런 국가 중심적 서사에 필자도 어깨가 으쓱해지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동일한 서사를 반복적으로 듣다 보니 그 선택적이고 불완전한 논리, 그리고 철학적, 도덕적 빈약함에 대해 반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의문은 지성을 낳는다는 어떤 어르신의 말씀처럼 비판적 사유를 통해 국가적, 이념적 프레임 이상의 서사를 찾기 시작했다.    지난 5월 프린스턴 대학에서 진행된 행사에 초청된 몇몇 교수는 한미동맹 70주년에 대한 사유는 1953년부터가 아닌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1882년부터 1950년까지 ‘또 다른’ 70여 년 동안 한반도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해 더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6·25 이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저버렸다는 것을 언급했다.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 통치를, 미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과 한반도 통치를 용인했던 역사를 상기시킨 것이다. 성급한 가치판단을 경계하고 국익과 역사의 흐름에 따라 가변적이고 복잡한 국제관계의 성격을 인지해야 함을 꼬집은 것이다.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바탕이 된 혈맹과 국가적 발전은 숭고한 것이지만 2023년 현재 만약 한미동맹의 근간을 이르는 대서사가 ‘반공주의’ 혹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라는 이념적 틀에 갇혀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외교·정치적 수사는 될 수 있을지언정 현시대를 살아가는 양국 국민의 지적 사유와 시대적 고민의 수준에는 부합하지 못할 것이다. 혹자는 미-중 간 새로운 냉전 분위기가 고조되는 등 차가운 국제관계 현실에서 무슨 순진한 사고냐며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 초월적인 서사를 상상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과거 이념대결의 승리라는 프레임을 넘어서는 인류애와 보편성에 기반을 둔 서사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그 서사를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에서 발견한다. ‘디아스포라’란 ‘재외동포’를 지칭하는 학문적 용어로 과거에는 팔레스타인 외의 지역을 유랑하던 유태인들을 지칭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모국 밖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의미한다.     필자는 이 개념을 단순히 지리학적 의미가 아닌 도덕적, 철학적, 인문학적으로 적용해보고자 한다. 즉, 필자가 정의하는 ‘디아스포라’는 미국에 사는 한인들인 동시에 ‘다양한 이들이 모인 사회 안에서 존재하는 이방인적, 혼합적, 소수자적 시선과 정체성’이다.     만약 우리가 한미동맹의 서사를 이념이 아닌 1903년 하와이에 도착한, 아니면 200만 명이 넘는 재미 한인들의 역사와 이야기, 그들의 사유 방식에서 모색해 보면 어떨까.     필자는 ‘한미동맹 70주년’의 대서사를 한인 이민자들의 존재 방식이라는 창조적 시각으로 사유해 보고자 한다.   ▶전후석 -UC샌디에이고, 시라큐스 법대 졸업 -뉴욕주 변호사 -다큐멘터리 헤로니모(2019), 초선(2022) 제작 전후석 / 다큐멘터리 감독디아스포라 시선 한미동맹 이념 한미동맹 70주년 올해 한미동맹 국가적 이념적

2023-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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